헉, 헉, 헉.
가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고통에 저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한참동안 숨만 고르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은 숨 쉴만 한 것 같아 고개를 슬쩍 들자, 높고 단단해 보이는 벽이 보였다. 검고 시커먼 벽. 한껏 달려온 끝에 마주한 것이 벽이라니. 이렇게 허탈할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다가가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벽이 사라질 리 없었다. 하. 겨우 이것 때문에 그렇게 달려왔다고? 다리에 힘이 빠져 벽에 기대 털썩 주저 앉았다.
하긴. 그래야 내 인생이지. 제대로 풀리는 게 있을 리 없다. 꼬일 대로 꼬이고, 얽힐 대로 얽힌 인생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순탄해 보여도 결국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힘껏, 열심히 해봐야 결국은 물거품으로 끝났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얼마나 달린 건지도 모를 정도로 열심히 달렸다. 사실 막다른 길을 마주친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깊게까지 들어온 후 막다른 길을 마주하자 절망감이 먼저 차올랐다. 돌이킬 수 있다고, 조금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위안하며 몇 번이나 새 길을 찾아 달리고 달렸다. 그러다가 이 길을 마주했다. 분명, 이 길은 분명히 맞다고 생각했다. 샛길이 없진 않았지만 명확한 정도(正道)로 보였고, 그러니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그런데 그런 길이 막혔다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게 이러지? 딴 속셈을 가지고 욕심을 낸 것도 아니고 그저 제대로 된 길을 따라 뛰었을 뿐이다. 요령을 피우지도 않았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막다른 길이라고? 그럼,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깊게 숙인 고개를 끌어안듯 웅크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눈물을, 나약함을 세상에 들킬 것만 같았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멀리 와버렸는데, 이걸 어떻게 다시 하란 말인가. 다시 한다 한들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결국 내 길은 또 무너지거나 막혀버리겠지.
절망감에 파묻혀버리자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대로 잠이나 자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퀭한 눈을 들어 이제껏 달려온 길을 바라보았다. 그간 달려온 길이 쭉 뻗은 직진도 아니었기에 보이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저걸 돌아가서 다시 길을 찾으라고? 못 해.’
나는 웅크린 그대로 바닥에 누워 버렸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미로 찾기 따위 이젠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될까? 그냥, 그냥 쉬면 안 될까?
그렇게 생각하며 몸에 힘을 풀고 그대로 대 자로 누웠다. 이대로 가만히. 그대로 어두운 땅바닥에 묻혀서 잠들고 싶다. 그래 이것만큼은 누구도 뭐라 할 수 없겠지. 나는 이미 너무 지쳤는 걸. 이젠 뭘 더 얻기 위해 달려갈 힘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있는데 방해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눈부신 햇살. 눈을 감고 있는데도 하늘의 빛은 강렬하게 내 눈을 괴롭혔다. 어쩔 수 없이 슬며시 눈을 떠보았다.
그러자 생각하지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푸르게 보이는 하늘. 그리고 초록의 나뭇잎들. 이 미로를 헤매인지 오래지만 미로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저 녹색의 나뭇잎은 뭐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엄청나게 높이 매달려 있는 나뭇잎이니까, 나무도 엄청나게 큰 모양이었다. 그런 게 보인다면 저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땅이 있을 것이다. 그건 아마 이 미로의 끝이든, 중간 지점이든 그럴 것이다. 몸을 일으켜 제대로 살피자 나뭇잎이 뻗어 나온 방향은 내 앞을 막고 있는 길의 너머였다. 그렇다면…
“틀리지 않았어.”
나는 새카만 벽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게 올바른 길이라면 넘어갈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여기저기를 만져보던 중 가장 구석진 곳에 홈이 파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저 검게만 보이던 벽이라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나는 그 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더듬었다. 그리고 곧 무언가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당기는 버튼이다.’
망설일 것은 없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이 절망만 안겨주던 미로였는데, 그걸 떠나는 데 망설임이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내가 달려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분명 아까 벽에 기대서 바라보았을 때와 다를 바 없는데… 어째서 지금은 조금 포근한 느낌을 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를 돌아본 나는 다시 벽을 마주보았다. 이유모를 아쉬움이 생기긴 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나아가봐야 할 때였다.
철컥.
손에 힘을 주자 역시나 무언가 작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얼른 손을 빼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벽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나는 양손을 꽉 쥐었다. 아직 이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다 해도 여기 머무르는 것보단 낫겠지. 뭐든 있을 테니까. 최소한 저 너머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비록 마지막엔 망가질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결심을 다졌다. 매번 꼬이고 얽히고 실패했던 삶이었지만, 굴곡이 없던 것도 아니다.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올라설 때도 있었다. 그러니.
“이 앞에는 올라서는 길이 펼쳐지길.”
그 희망이 있으니 웃을 수 있다.
쓰려고 생각한 전부를 쓴 몇 안 되는 날